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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의 오늘》 전시관에서는 케이컬처K-Culture에 대해 보여준다. K케이에는 우리가 공유해 온 일상생활과 민속문화가 담겨 있다. 그 중 예로부터 오늘날까지 이어온 ‘물건’, 공유한 ‘취향’, ‘함께’의 순간을 꼽아 K로 선보인다.
19세기와 20세기 초, 세계는 우리를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고요한 아침의 나라’라는 표현 속 우리는 지게 위에 일상을 쌓고, 호미로 삶의 터전을 일구고 있었다. 또 우리는 자연 재료로 만든 옷을 입어 자연과 하나 되었다. 함께하는 시간 속에서 일상의 원동력을 찾았다.
21세기, 오늘도 세계의 눈은 우리에게 향한다. 백 년 전 세계가 낯설어한 우리의 일상은 오늘날 낯익은 케이컬처의 중심이자 세계가 함께 즐기는 대상이 되었다.
우리를 바라보는 세계의 시선은 계속 변화한다. 그러나 오늘의 우리는 과거에서 보낸 여느 때와 같이 오늘을 보낸다. 그 속에서 같은 취향을 즐기고, ‘함께’의 의미를 잊지 않는다. 《한국인의 오늘》 전시관을 통해 K로 정의된 우리의 일상을 새로이 되돌아보는 기회가 되길 바란다.
‘한국적인’이란 말에는 전통의 지혜와 정신이 담겨있다. 오늘의 시각에서 끊임없이 전통 요소를 적용하는 시도와 실험은 또 다른 모습의 전통을 만드는 토대가 된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K케이라 부른다.
물건의 외형은 변화한다. 그러나 물건의 기능은 인간의 삶 속에서 사용된 순간부터 오늘날까지 유지된다.
우리 일상 가까이에는 무엇이 있었을까? 대표적으로 지게, 호미, 옹기, 한지를 꼽을 수 있다. 지게는 우리 일상의 무게를 견디고 견인하는 역할을 한다. 호미는 삶의 터전을 일구고 생기를 북돋아 주는 물건이다. 옹기는 K-푸드의 근간이 되었다. 한지는 우리의 지친 몸을 누이는 공간이 되고 생활 소품이 되었다.
무엇 하나 없어서는 안 될 우리의 쓸모 있는 물건이다.
자연은 우리 삶의 터전이자 우리가 꿈꾸는 이상향이었다. 자연을 닮으려는 우리의 노력은 곧 오늘날 우리의 취향이 되었다.
생활 공간은 자연에서 영감받은 기물들로 꾸며졌다. 자연 재료로 만들어 소색素色옷을 입은 우리는 땅에 내려앉은 하얀 구름 떼와 같아 보였다. 하얗고 완만한 곡선의 자기를 보며 무한한 아름다움을 상상했다. 계절의 흐름으로 변화하는 자연의 색은 우리 일상을 다채롭게 물들였다.
우리 생활의 모든 곳엔 ‘자연’스럽게 살고자 한 우리의 취향이 묻어난다.
우리는 ‘오늘’이라는 시간 속에서 다양한 사람들과 ‘함께’ 일상을 보낸다. ‘밥 먹었어?’라며 주고받는 안부 인사, 노랫말로 공유하는 관심사, 한마음으로 응원하는 모습, 포장마차에서 음식을 나눠 먹는 모습 등은 평범하지만 우리가 지속해 온 연결의 행위들이다. 그렇게 축적된 우리의 일상은 세계인의 시선에서 ‘케이컬처’로 새롭게 탄생한다.
타자의 시선과 말로 우리의 일상을 보고 들을 때, 우리는 비로소 일상 속 새로운 우리와 마주한다. K는 우리가 그간 보내온 ‘오늘’의 축적물이다. 앞으로 K의 모습은 어떠할까? The K-존에서 그간의 K를 살펴보고 앞으로의 K를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인의 일 년》 전시관에서는 19세기부터 20세기까지 한국인의 일 년 생활상을 보여 준다. '정월正月', '봄', '여름', '가을', '겨울' 등 계절과 시간의 흐름에 따라 되풀이된 우리네 삶의 모습을 그렸다.
새해를 맞이해 집마다 걸어 둔 복조리와 설빔을 입은 사람들을 볼 수 있는 정월, 한 해 농사의 시작을 알리는 쟁기질 소리와 꽃놀이를 즐기는 사람들의 밝은 목소리가 들려오는 봄, 무더위 속에서도 부채와 모시옷으로 잠시 시원함을 느낄 수 있는 여름, 수확의 기쁨과 함께 풍성한 먹거리를 맛보며 조상에게 감사를 드리는 가을, 바깥은 춥지만 방과 사람들의 정만큼은 따뜻했던 겨울의 풍경을 만날 수 있다. 또한, 겨울과 이어지는 한옥에서는 사계절 한옥의 풍경과 그곳에서 펼쳐지는 사람들의 삶의 모습을 실감형 영상으로 보게 된다.
이 전시관은 전통 시대의 세시풍속, 생업, 신앙, 의식주만이 아니라 20세기까지 이들의 변화상을 비교해서 볼 수 있도록 꾸렸다. 시대에 따라 한국인의 일 년 모습과 의미는 변했지만, 그 속을 관통하는 가치는 이어진다.
정월음력 1월은 한 해를 시작하는 첫 번째 달이다. 새해를 맞이해 일 년의 풍요豐饒와 안녕安寧을 기원하는 다양한 세시풍속歲時風俗이 설부터 정월 대보름음력 1월 1일~1월 15일에 펼쳐진다. 설에는 새해를 축하하는 의미에서 떡국을 먹고, 세배와 덕담으로 새해 인사를 나눈다. 설을 비롯해 정초에는 집마다 복조리를 걸어 복을 빌고, 토정비결을 보며 한 해 운수를 점치는데, 이런 풍속은 현재까지도 부분적으로 이어지고 있다.
정월 대보름에는 마을의 풍요와 안녕을 기원하는 의미에서 마을 제사를 지내며, 줄다리기를 하고, 새해 첫 번째 뜨는 둥근 달을 보면서 개인마다 소원을 빈다. 지금도 여전히 가정과 마을 단위로 윷놀이를 즐기고 있다.
봄은 겨우내 얼었던 땅이 녹고 만물이 싹트는 계절로, 한 해 농사農事와 어로漁撈의 출발점이다. '봄이 들었다'는 뜻인 입춘양력 2월 4일경은 계절적으로 아직 겨울이다. 이 때문에 입춘이 지나고 날씨가 따뜻해진 이후에야 농촌에서는 논밭을 갈며 본격적인 한 해 농사를 시작한다. 또한, 어촌에서는 대개 봄의 초입初入에 드는 영등날에 굿을 하고 나서 고기잡이를 시작하기도 한다.
봄바람이 따스하게 불고 봄꽃이 활짝 피는 삼짇날 무렵에는 삼삼오오 짝을 지어 꽃놀이와 답청踏靑을 즐기고, 산과 들에서 몸에 좋은 봄나물을 뜯는다. 또한, 한식寒食에는 조상의 은덕恩德을 기리기 위해 무덤을 단장하고 제사를 지낸다.
여름은 볕이 강하고 비가 잦아 작물의 생명력이 왕성한 계절로, 농사일이 가장 많은 시기이자 긴 무더위와 장마를 피해 잠시 일을 쉬어 가는 때이기도 하다. 여름철에 가장 중요한 농사일은 모내기와 김매기로, 마을에서는 두레를 결성結成해서 함께 일한다.
염전에서는 여름 햇볕에 소금 생산을 왕성하게 하고, 해녀는 바다에서 미역, 전복, 성게를 활발하게 채취한다. 단오에는 여름을 맞이해 단오부채를 주고받으며, '단오장端午粧, 단오 치장'이라 하여 창포물에 머리를 감고 시원한 모시 저고리와 치마를 차려입는다. 또한, 그네뛰기와 씨름을 즐기며, 강원도 강릉을 비롯한 여러 지역에서 단오제端午祭를 지내기도 한다. 유두에는 계곡이나 강을 찾아 무더위를 식히는데, 유두 풍속은 오늘날 여름휴가와 피서避暑로 이어지고 있다.
가을은 봄여름에 파종한 작물을 수확하는 풍성한 계절이다. 농촌에서는 벼를 베고 타작해 저장하는 등 한 해 농사의 마무리로 바쁘게 보낸다.
가을의 한가운데에 있는 추석은 설과 더불어 한국에서 가장 큰 명절 중 하나로, '가배嘉俳'라 하던 신라 시대 길쌈 대회에서 그 기원을 찾기도 한다. 추석에는 햇곡식으로 술과 떡을 빚어 조상에게 감사를 드리는 차례를 지낸다. 도시화와 이농離農 현상이 두드러지면서 요즈음에는 추석이 되면 도시로 떠난 사람들의 귀성歸省 행렬이 이어지는데, 귀성하는 사람들은 선물 꾸러미를 한 아름 들고 고향을 찾는다.
겨울은 눈이 내리며 매서운 추위가 찾아오는 계절이다. 농촌에서는 한 해를 마무리하고 새해를 준비하면서 땔나무를 하거나 농기구 수리 등을 하며 쉬지만, 어촌에서는 굴이나 김 양식, 홍어나 명태잡이로 바쁜 나날을 보낸다. 또한, 여러 가정에서는 기나긴 겨울철에 먹을 김장을 하거나 된장, 간장을 담그는 데 필요한 메주를 쑤며, 겨울을 따뜻하게 보내기 위해 난방煖房과 방한防寒에 힘을 기울인다.
상달음력 10월에는 '상달 고사'라 하여 수확한 농작물로 여러 가신家神에게 집안의 평안과 복을 비는 고사를 지낸다. 동지에는 '동지책력冬至冊曆'이라 하여 다음 해 달력을 주고받고, 팥죽을 쑤어서 먹으며 대문과 벽 등에도 뿌려 나쁜 기운액(厄)을 쫓는다. 요즈음에는 동지 무렵에 거리마다 크리스마스캐럴과 구세군 종소리가 울려 퍼져 연말의 분위기를 전하고, 사람들은 한 해를 보내는 송년送年 인사를 나누느라 분주하다.
한옥 사랑채와 안채, 마당과 장독대에서 펼쳐지는 봄, 여름, 가을, 겨울의 사계절 풍경과 그 속에서 벌어지는 일상으로 들어가 보세요.
《한국인의 일생》 전시관에서는 조선시대1392~1910에서 현대까지 한국인이 태어나 죽을 때까지 겪게 되는 주요 과정을 전시하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유교 이념에 의해 아들 중심의 가계家系 계승이 가장 중요했기에, 출산 전부터 남자아이를 기원하였다. 출산 후에는 백일잔치, 돌잔치를 열어 아이가 무사히 성장한 것을 축하하였다. 남자는 20세에 관례冠禮를, 여자는 15세 전후에 계례笄禮를 치러 어른으로 인정받았다. 혼례婚禮를 통해 가족을 구성하고, 남자는 관직에 나가거나 직업을 가져 가족을 부양하며, 여자는 집안 살림을 관장하였다. 사람이 죽으면 가족은 그 슬픔을 상례喪禮를 통해 극복하며, 돌아가신 조상에 대해 제사祭祀를 지냄으로써 자손의 번창과 친족의 화합을 도모하였다.
오늘날에는 이념과 가치관 등의 변화로 성별 관계없이 아이의 출생이 중요한데, 백일과 돌잔치를 열어 아이가 건강하게 자라기를 바라는 관습이 이어지고 있다. 성년식은 축소되었고, 혼례 또한 비교적 간소화 되었지만, 의례의 기본 구조와 의미는 변하지 않았다. 혼례로 형성된 가족 이외에 가족은 구성과 개념이 다양해지고, 남녀의 역할 구분도 점차 사라져간다. 상례喪禮와 제례祭禮 문화 또한 형식과 절차 등이 변화되었으나 조상을 기리며 후손의 안녕과 가족의 화합을 꾀하는 모습은 예나 지금이나 크게 다르지 않다.
조선시대에는 아버지에서 아들로 이어지는 가계 계승이 사회적인 관습이었기 때문에 어느 집안에서나 아들 출생을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였다. 대부분의 집안에서는 삼신할머니에게 '자손번창子孫繁昌'과 건강한 남자아이의 출산出産을 기원하였다. 출산 후에는 대문에 금줄을 쳐 아이의 출생을 알리고 부정한 출입을 막았으며, 태胎를 태항아리나 깨끗한 곳에 묻거나 불에 태워 아이가 잘 자라기를 기원하였다. 유아 사망률이 높았으므로 아이가 태어난 지 100일 후에 백일잔치를 열어 비로소 축하하고, 1년 후에는 돌잔치를 열어 아이의 장래를 점쳤다.
오늘날에는 성별과 상관없이 아이의 출생을 축하하는데, 주로 병원에서 출산하면서 출산과 산후産後의 금기와 의례는 사라져간다. 백일을 기념하고 돌잔치를 열어 아이가 건강하게 자라길 바라며 축하하는 관습은 오늘날에도 이어지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삼강오륜을 바탕으로 하는 유교적인 윤리교육을 통해 도덕적인 사회를 만들려고 하였다. 국가에서는 효자·충신 열녀를 표창하고,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 등을 그림과 함께 한글로 번역하여 보급하였다. 남자는 서당에서 글 읽기와 쓰기 등을 배우고, 과거 시험을 준비하기 위해 향교鄕校나 서원書院에서 유교 경전이나 역사책을 공부하였다. 여자는 집안에서 받은 한글 교육으로 문자 생활이 가능해져, 편지를 주고받거나 한글 번역서에서 새로운 정보를 얻어 지식을 넓혀 갔다.
오늘날에는 인간으로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들을 주로 학교 교육을 통해 학습한다. 조선시대와 달리 남녀 구분 없이 일반적으로 유치원과 초등학교, 중고등학교 등에서 지식을 배우고 익힌다. 이후 고등학교를 졸업하거나 그 과정에 해당하는 교육을 마치면, 적성에 따라 대학교를 진학하거나 직장에 들어가기 위해 각종 시험과 평가를 치른다.
성년식은 아이가 자라서 어른으로 인정받는 의례로 시대와 계층, 성별마다 달랐다. 조선시대 양반가에서는 중국 『주자가례朱子家禮』의 영향으로 남자는 '관례冠禮', 여자는 '계례笄禮'라는 성년식을 치렀다. 남자는 20세 전후에 집안 어른들 앞에서 상투를 틀고 갓 등을 차례로 쓰며, 성인 이름인 자字를 받는 관례를 행하였다. 여자는 15세 전후로 쪽을 찌고 비녀를 꽂는 계례를 행하였는데, 일반적으로 혼례로 성년식을 대신하였다. 농가의 남자는 일정한 나이가 되면, 마을공동체로부터 힘과 농기구 다루는 기술 등을 평가받은 후 성인으로 대접을 받았다.
오늘날의 성년식은 과거와 비교해 축소되었지만, 만 19세에 이르면 성년으로서 독립된 인격체로 인정받고, 법정 대리인의 동의 없이 법률 행위를 행사할 수 있다.
조선시대는 엄격한 신분사회였지만, 엄격한 사회제도와는 달리 법적으로는 과거科擧 시험을 통해서 신분 상승이 가능한 사회였다. 학문을 숭상하는 유교 사회에서는 문관을 무관보다 우대하였으며, 신분과 남녀 성별에 구분을 두었기 때문에 가질 수 있는 일정한 지위와 직업의 범위가 달랐다.
1894년 갑오개혁甲午改革으로 신분제가 폐지되고 사회 변화에 따라 직업 제한과 같은 구분은 없어졌다. 집주릅가쾌家儈, 사쾌舍儈, 매분구賣粉嫗 등 형식은 변하였어도 조선시대부터 계속되어온 직업이 있었던 반면, 사라지거나 새로 생겨나는 등 직업에 변화가 일어났다. 오늘날은 남녀 차별 없이 조건과 능력에 따라 다양하고 전문화된 일을 선택하여 개인이 사회에 참여하고, 사회의 일원으로 역할도 할 수 있게 되었다.
혼례 절차는 시대에 따라 변화가 있었는데, 조선 후기에는 중국의 가족 예절서인 『주자가례朱子家禮』의 혼례 절차와 재래의 관행이 절충되어, 신랑이 신붓집에서 혼례를 행하되, 당일 또는 3일 후에 자기 집으로 돌아와 조상께 인사를 드리고 부모님께 폐백을 올렸다. 조선시대는 가족을 형성하고 아버지에서 아들로 이어지는 가계 계승은 자식의 당연한 도리였으며, 가풍을 잇고 집안의 평안을 위해 남녀의 역할과 의무가 다르게 부여되었다.
오늘날은 혼례 절차를 비롯하여 혼례 장소와 혼례복이 변화하고, 신혼여행을 비롯해 새로운 혼례풍속도 등장하였지만, 혼례의 기본 구조와 의미는 크게 변하지 않았다. 오늘날 가족 구성원의 역할은 구별되지 않으며, 가족의 형태도 대가족에서 핵가족으로 변하는 등 점차 다양해지고 있다. 또한, 국제결혼이 늘어나면서 오래 이어져 오던 단일민족 전통성도 변화하고 있다.
수연례는 장수長壽를 축하하는 잔치로, 보통 회갑回甲, 還甲 잔치를 이른다. 조선시대에는 집안 어른이 만 60세 생일이 되면, 회갑·환갑이라 하여 수연례壽宴禮를 베풀었다. 당시 60세 이상은 장수를 뜻하였기 때문에, 자손들은 이를 영광스럽게 여겨 친척과 친구들을 초대하여 생일을 기념하면서 수연례를 통해 효심孝心을 드러냈다. 오늘날에는 인간 수명이 길어지면서 회갑回甲에는 수연례보다 가족 간의 식사, 기념 여행이 보편화 되었으며, 칠순七旬이나 팔순八旬에 수연례를 치르고 있다. 이처럼 장수에 대한 개념이 바뀌면서 장수를 축하하고 기원하는 의례는 시대에 따라 변하고 있다.
사람은 나이 들면서 점차 병에 자주 걸리게 된다. 조선 후기에는 병이 들거나 몸이 허약해지면 약방에서 치료하였다. 한약방에서는 주로 중국의 의학서를 참고하였지만, 허준許浚, 1539~1615의 『동의보감東醫寶鑑』이 보급되면서 병의 증상에 따라 침이나 뜸을 하고, 약을 조제하여 병을 치료하였다. 일부 사람은 굿이나 부적符籍과 같은 주술呪術 등 초자연적인 힘에 의지하여 병을 예방하거나 위안을 얻고자 하였다.
오늘날에는 한의학과 더불어 서양 의료기술인 양의학으로 병을 치료하는데, 과학 기술을 이용하여 진료와 치료를 하면서 인간의 수명은 점점 더 길어지고 있다.
상례는 죽은 사람을 땅에 묻고 탈상脫喪하는 의례를 말한다. 조선시대에는 '효孝'라는 유교적인 윤리에 따라 삼년상을 자식의 도리로 여겼다. 자식들은 돌아가신 이의 마지막 길을 화려한 상여에 태워 보냈고, 내세來世를 위해 생활 용기로 쓰일 명기明器를 함께 묻기도 하였다. 그리고 삼년상 동안 자식은 벼슬살이나 농사일도 그만두고 집에 마련된 상청喪廳이나, 산소 곁에 여막廬幕을 짓고 돌아가신 이를 위해 마지막으로 효를 다하였다.
상례 절차와 문화는 시대의 흐름과 생활환경에 따라 많이 변화하였다. 오늘날에는「가정의례준칙」이나 장의사 등이 일반화되면서 매장埋葬, 화장火葬 등 상례가 간소하게 행해지고 있지만, 돌아가신 이에 대한 애도의 의미는 바뀌지 않고 계속되고 있다.
제사는 돌아가신 조상을 모시고 때마다 추모하는 의례이다. 조선시대에는 조상이 마치 살아 계신 것처럼 모시는 것을 최고의 '효孝'로 여겼다. 유교적인 제례에 따라 집안에 사당祠堂을 짓거나 벽감壁龕을 만들어 고조부모, 증조부모, 조부모, 부모 등 4대 조상의 신주를 모셨다. 후손들은 이들 4대 조상의 돌아가신 날, 설·추석 등 명절 제사를 통해 감응[感應]하였다.
오늘날은 조선시대와 달리 유교 이념에서 벗어나 여러 종교의 영향으로 효와 조상에 대한 관념이 달라지면서 제례 관습도 빠르게 변하고 있다. 하지만 조상을 기리며 자손의 안녕과 가족의 화합을 꾀하는 모습은 예나 지금이나 크게 다르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