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석기시대 사람들은 자연에서 열매나 풀뿌리를 구해 먹거나 짐승을 잡아먹었다. 이를 위해 들판이나 바위산에 있는 돌을 이용하여 거칠고 투박한 도구를 만들었다. 사람들은 식량 채집과 사냥하기 좋은 곳을 찾아 끊임없이 옮겨 다녀야만 했다.
신석기시대 사람들은 고기잡이와 사냥, 채집활동과 함께 부분적으로 농사를 짓기 시작하면서 점차 한 곳에 정착하여 살게 되었다. 돌과 동물의 뼈를 이용하여 날카롭고 정형화된 도구를 만들었다. 돌을 갈아 만든 석기(간석기)는 당시 생활의 변화에 맞춰 농경용, 공구용, 사냥용, 고기잡이용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 돌이나 동물의 뼈로 만든 낫, 돌보습, 돌괭이 등과 나무열매나 곡물의 껍질을 벗기는 갈판·갈돌은 당시 대표적인 농기구였다. 사냥을 위한 활·화살, 고기잡이를 위한 낚시·그물 등은 좀더 발달된 생활도구였다. 또한 농사를 지으면서 운반과 저장을 위해 토기를 만들기 시작하였다.

기원전 10세기경에 만주와 몽골 등지로부터 퉁구스계에 속하는 새로운 종족이 한반도로 진출하여 청동기 문화를 전파하면서 정착하게 되었다. 청동기시대 사람들은 농사를 지으면서 강이나 바닷가에 인접한 낮은 구릉이나 평지에 움집을 짓고 마을을 이루며 살았다. 농경무늬 청동기 문양에서 보듯이 괭이나 따비를 이용한 밭농사가 성행하였음을 알 수 있다. 여주 흔암리와 부여 송국리 등에서는 탄화미가 출토되었고, 논산 마전리와 울산 옥현 등에서 확인된 논 유적을 통해서 벼농사를 지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주요 도구로는 청동제 의기 및 무기, 생산을 위한 간석기[磨製石器], 다양한 종류의 무늬 없는 토기[無文土器] 등이 제작․사용되었다. 본격적인 농경의 시작으로 생산력이 증가되고 사회 내부에 신분적 차이가 발생하였다. 이는 이 시기에 많이 만들어진 무덤형식인 고인돌과 돌널무덤[石棺墓], 독무덤[甕棺墓]의 규모나 부장품을 통해 알 수 있다.
전시된 청동기시대 마을 모형은 현재까지 발굴된 유적이나 유물 등을 토대로 하여 당시의 마을생활 모습을 추정 복원한 것이다.
![바위에 새긴 소망, 풍요(豊饒) 울산 반구대 바위그림[암각화]](../images/Display/first05_txt4.gif)
1971년에 발견된 울산 반구대 바위그림은 울산광역시 울주군 언양읍 대곡리 태화강 암벽에 새겨져 있다. 국보 제285호로 지정되었으며, 그림이 있는 부분은 가로 약 8미터, 세로 약 2미터이다. 날카로운 도구로 돌을 쪼아내는 기법으로 면과 선들을 표현하였는데, 신석기시대 후기에서 청동기시대에 걸쳐 사용된 것이다. 바위에는 호랑이, 멧돼지, 토끼 등의 짐승 그림과 고래, 거북, 물고기 등의 그림, 다양한 기하학 무늬와 생활 모습 등이 그려져 있다. 사냥하는 모습과 고래잡이의 모습, 어로행위의 모습 등의 그림을 통해서 사냥과 어로의 풍요를 기원하고 있다는 것을 추정할 수 있고, 반구대 지역이 주술 및 제의를 행하던 장소였다고 추측된다. 특히 나무 울타리에 갇힌 짐승 그림에서는 목축을 시작하는 생활방식의 변화를 엿볼 수 있다.
영상은 바위그림에 등장하는 여러 장면들을 재구성하여 신석기시대 후기에서 청동기시대에 걸친 사람들의 생활모습을 보여준다.

우리나라 최초의 국가인 고조선과 관련된 건국신화는 고려의 승려 일연이 지은 《삼국유사》에 실린 단군신화이다. 환웅이 주관했다는 비·구름·바람 등은 농경문화와 관련이 있고 세 개의 천부인(天符印)은 청동기의 사용과 정치적 지배자의 등장과 관련이 있으며, 곰·호랑이와 환웅의 관계는 여러 집단의 이동과 정복·통합과정에서 국가가 성립하던 역사적 상황을 반영한다고 할 수 있다. 고인돌과 미송리형 토기, 비파형동검을 비롯한 초기 고조선 문화의 특징적인 여러 청동기 유물들이 한반도 서북부와 남만주의 발해만 일대에 걸쳐 많이 발견되고 있다. 기원전 4세기 무렵 고조선의 지배자는 스스로 왕이라 하였고 기원전 3세기경 철기문화를 받아들이면서 더욱 강성해졌다. 철기 사용으로 생산력이 늘어나 경제가 발전하고 통치조직이 확립되었으며 사회질서를 위한 ‘8조의 법’을 만들었다. 이후 한반도에서 주로 출토되는 세형동검으로 대표되는 청동기·철기문화가 발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