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철기가 처음 사용된 것은 기원전 4-3세기 경이지만 당시에는 주조해서 만든 도끼와 끌 정도의 간단한 공구류였다. 전국적으로 철기가 제작되고 사용되는 시기는 이보다 100-200년 후부터이다. 단단하고 예리한 철기는 쓰임이 다양하여 쇠로 만든 도끼, 괭이와 삽, 따비, 낫, 손칼 등 철제 농기구를 일상도구로 사용하게 되었다. 철기 사용에 따라 농업생산력이 높아지자 생산물의 분배를 둘러싸고 다른 집단과의 갈등이 심화되어 충돌이 잦았다. 그 결과 각종 칼, 창, 화살촉 등의 공격용 무기와 방패, 투구, 갑옷 등의 방어용 무기들이 개발되었고, 전쟁의 승패가 우수한 철제 무기에 의해 판가름이 나게 되었다. 사회적 생산력이 증대되고 집단 간의 전쟁과 통합이 활발히 이루어지면서 고구려, 백제, 신라와 가야 등의 고대국가들이 등장하였다.

고구려는 신라·백제와 함께 한국 고대사회를 주도했던 나라이다. 중국 등의 여러 민족과 교류를 통해 새로운 문화를 수용하면서 독자적인 문화를 이룩하였다. 동북아시아 일대에서 문화적 발전을 선도했던 고구려는 현재까지 남아 있는 각종 유적이나 유물, 그리고 고분벽화를 통해 정치와 사회, 문화가 융성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고구려 고분벽화는 생활풍속도 및 천문도(天文圖), 사신도(四神圖) 등이 주류를 이룬다. 특히 생활풍속도에는 고구려 사회의 일상생활과 사회풍속, 과학기술, 예술활동, 종교신앙, 옷차림, 음악, 기예, 체육활동 등의 내용이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어 고구려 사람들의 생생한 생활모습을 엿볼 수 있다.
여기서는 고구려 고분벽화의 요소들을 상징적으로 활용하여 공간구성을 하고, 고분벽화의 다양한 생활모습들을 재구성하여 영상으로 알기 쉽게 표현하고 있다.

발해(698~926)는 대조영(?~719)을 중심으로 고구려 유민이 주체가 되고 여기에 말갈족이 결합하여 건국되었다. 건국 초기에는 당나라와 대립했지만 8세기 중반부터는 당나라를 축으로 발해, 신라, 일본이 공존하는 국제관계의 틀을 형성하였다. 10대 선왕(818~830년 재위)부터 13대 왕에 이르기까지 ‘바다 동쪽의 융성한 나라’, 해동성국(海東盛國)이라 불리며 전성기를 누렸다.
전시된 무덤은 발해 3대 문왕의 넷째 딸인 정효공주(757~792)의 무덤으로 고증을 거쳐 실제 크기로 제작되었다. 무덤 칸(현실)은 벽돌로 쌓고 벽화를 그렸으며 그 위에 3~4단의 평행고임을 한 다음, 큰 판석을 위에 덮었다. 현실 위 지상에는 탑을 쌓았다. 무덤 칸을 벽돌로 쌓은 것은 중국 당나라 양식, 평행고임 천정은 고구려 양식, 무덤 위에 탑을 쌓는 것은 발해의 독창적인 양식이다. 무덤에서는 공주 부부의 유골이 수습되었으며 12인의 인물 벽화와 묘지석, 인형 조각이 발견되었다.

경주는 서라벌, 동경(東京), 경도(京都)라 불리며 삼국시대부터 통일신라시대에 이르기까지 천년간 지속된 신라의 왕경(王京)이 자리했던 곳이다.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모든 분야의 최고 중심지로서 신라국가의 흥망과 맥을 같이하였다. 기원전 37년에 신라의 시조인 박혁거세가 금성을 축조한 이후, 자비마립간 12년(469)에 시가지를 정연하게 구획하면서 경주는 계획도시로서의 면모를 갖추기 시작하였다. 이때부터 현대 도시계획의 가로(街路) 체계인 구획과 같이 160m x 140m의 바둑판 형태로 된 방(坊)으로 나뉘게 되었다. 이후로 주변 지역이 편입되고 인구가 대거 유입됨에 따라 약 90만 명에 이르는 거대 도시로 발전하였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신라의 전성기인 9세기말 경주에는 178,936호(戶), 1,360방(坊), 55리(里), 35댁(宅)의 부자집[金入宅]이 있었다고 한다.
이 모형은 실제 크기를 1/400로 축소하여 경주의 중심지 모습을 재현한 것이고, 영상은 주요 유적지의 과거와 현재 모습을 대비할 수 있도록 제작한 것이다.

전라북도 부안군 변산면 격포리 죽막동에는 한반도 최대의 제사 유적지가 있다. 변산반도 서쪽 끝 높은 곳에 위치하여 물살이 센 칠산 앞바다를 조망하기에 좋다. 그리하여 이 곳에서는 일찍부터 바닷길의 안전을 기원하는 제사가 거행되었다. 제사 용구로 사용된 발굴 유물의 대부분은 4~7세기 전반에 걸친 백제 토기이기 때문에 백제의 제사유적으로 볼 수 있다. 분청사기와 백자 등의 출토유물로 보면 죽막동이 천년 가까이 항해의 안전을 기원하는 제사 장소였음을 알 수 있다. 죽막동 제사유적에서는 토기와 도자기뿐만 아니라 중국 동진(344~424)의 청자 항아리 조각, 가야와 왜의 제사용품인 무기류·마구류·석제 모제품 등이 출토되었다. 이를 통해 죽막동이 중국과 왜를 왕래하던 선박들의 안전한 항해를 기원하던 제사 장소였다는 것과 당시 백제가 중국과 가야·왜 등 주변 국가들과 활발한 교류를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삼국지》위서 동이전 왜조의 기록에 따르면 고대의 바닷길은 일찍부터 열려있었다. 바닷길을 통한 활발한 교류는 남해안 각지에서 발견되는 여러 유적과 유물 그리고 설화 등을 통해서 알 수 있다. 당시 가장 뛰어난 조선 기술과 항해 능력을 보유했던 장보고(?~846)는 중국과 일본을 연결하는 지점인 전라남도 완도군에 위치한 청해진을 발판으로 바닷길을 활짝 열었다. 이로 인해 신라는 물론 중국과 일본의 해상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장도 청해진유적에서 출토된 제사 및 생활용구 등에는 장보고가 활약하던 당시의 생활모습이 잘 나타나 있다. 바닷길을 통해 수없이 오고갔던 사람들과 문물들은 장보고가 열었던 바닷길을 통해 거쳐 갔고 신라의 번성도 장보고가 바닷길을 통한 활발한 무역활동의 뒷받침으로 가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