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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두띠동상
십이지신은 쥐(子), 소(丑), 호랑이(寅), 토끼(卯), 용(辰), 뱀(巳), 말(午), 양(未), 원숭이(申), 닭(酉), 개(戌), 돼지(亥)와 같은 12동물의 얼굴과 사람의 몸으로 표현한 신장으로 탑, 무덤의 호석이나 벽화 등에 장식되기도 하였다. 십이지는 각각의 상징과 함께 전통 생활문화와 밀접한 관련을 갖는데 하루를 12로 나누어 시간을 표시하기도 하였고, 12방위를 나타내기도 하였다.
수표
수표는 가뭄과 홍수를 대비하기 위해 수위를 재는 측량기구로, 조선시대 세종(1418∼1450)때 처음 만들어 한강변 바위와 청계천·마전교(馬廛橋, 후에 수표교라고 함)등에 세웠다. 처음에는 나무로 만들었는데 쉽게 썩어서 후에는 돌로 만들었다. 현재 남아 있는 수표는 영조 연간(1724∼1776)에 다시 제작하여 청계천 수표교 앞에 세운 것으로, 1960년 청계천 복개공사 때 수표교와 함께 장충단 공원으로 옮겨졌다가 1973년에 수표만 세종대왕기념관으로 옮겨져 보관되고 있다. 이 수표는 이것을 복제한 것이다. 수표 뒤에 눈금을 새겨 수위를 측정하는데, 3척 이하는 가뭄, 9척 이상은 홍수가 날 수 있음을 가리킨다.
주초석
이 석조물들은 종로 보신각(普信閣) 서편에서 지하철 공사를 하다 출토된 것으로 옛날 종로에 있던 종루(鐘樓)의 주춧돌과 댓돌이다. 종루는 조선 태조 4년(1395) 중부 운종가(雲鐘街)에 처음 세워졌고 세종 때에 대규모의 높은 다락집으로 개조해서 큰 종(鐘)을 매달아 아침·저녁으로 울리게 하였다. 이것이 임진왜란으로 불타자 전후(戰後)에 소규모의 종각(鐘閣)으로 재건하고 남대문의 종을 옮겨 달았다. 숙종 때 종각이 다시 중건되었지만 세종때와 같이 대규모의 종루로 재현시키지는 못하였다. 남아 있는 이들 석재로 보아 처음의 종루가 큰 규모였음을 추측해 볼 수 있다.
개항기상점 - 죽물전
대나무는 각종 생활용품의 재료로 다양하게 활용되었다. 조선시대에는 죽제품을 전문적으로 판매하는 죽물점이 있었으며, 이외에도 잡화점 성격의 상전(床廛)에서 일부 죽제품을 판매하였다. 플라스틱 용품의 등장 이후 죽제품을 찾는 사람은 점점 줄어들었으며, 최근에는 중국과 태국 등지의 죽제품이 수입되면서 국산 죽제품은 점차 설자리를 잃어가고 있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담양에서는 다양한 국산 죽제품 시장이 열리고 있다. 여기의 상점은 개항기 서울 종가(鍾街)의 죽물전을 재현한 것이다.
개항기상점 - 포목전
비단과 포목을 판매하는 상점으로, 조선시대 한성에서는 취급 품목에 따라 선전[線廛], 면주전(綿紬廛), 면포전(綿布廛), 저포전(苧布廛) 등으로 나뉘어졌다. 선전은 주로 중국으로 수입되는 고급 비단을 취급하였으며, 면주전은 명주를 중심으로 국내산 비단을 거래하였다. 이들 두 상점은 주로 상류층을 주고객으로 삼았으며 이윤도 많았기 때문에 높은 세금이 부과되었다. 면포전(백목전)은 포목류를 취급하였으며, 저포전은 모시를 거래하였다. 이들 상점은 모두 육의전(六矣廛)으로 분류되어 1894년 갑오개혁(甲午改革) 전까지 판매의 독점권을 행사했다. 여기의 상점은 개항기 서울 종가(鍾街)의 포목전을 재현한 것이다.
개항기상점 - 양태전
갓은 말총으로 만들기 때문에 재료가 풍부한 제주에서 많이 생산되었다. 하지만 가장 많이 소비되는 곳은 역시 서울로, 서울의 상가에는 갓을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양태전이 많이 자리잡고 있었다. 양태전은 주로 제주 등지에서 말총을 구입해 제작, 판매하는 방식을 취하였는데, 조선후기에는 개성상인이 제주의 말총을 독점하여 서울의 양태전을 위기로 몰아 넣기도 했었다. 시골의 경우, 정기적으로 열리는 장날에 구입하거나, 혹은 갓을 만드는 장인을 집으로 불러 며칠동안 제작하게 하고 노임을 주었다. 이 상점은 개항기 서울 종가(鍾街)의 양태전으로 비올 때 신는 나막신도 함께 판매하고 있는 모습을 재현하였다.
개항기상점 - 한약방
한약방은 우리의 전통 병원이자 약국으로, 진료 및 치료, 약의 조제와 약재의 판매를 겸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주로 구리개[銅峴:오늘날의 을지로]에 많이 있었다. 한약방의 입구에는 대체로 ‘신농유업(神農遺業 : 신농(神農)의 뜻을 이어받았다는 뜻이다. 신농은 중국의 전설속의 제왕으로 백성에게 농경을 가르쳤으며, 백초(百草)를 맛보아 약초를 찾아내 치병(治病)하였다고 전한다.이란 깃발을 걸어 한약방임을 표시하였다. 여기의 한약방은 약장(藥欌)이 놓인 마루를 중심으로 한쪽에는 의원이 환자를 치료하는 침방이 꾸며져 있고, 다른 한쪽에는 각종 약재를 판매하는 매장을 갖추고 있는 개항기의 한약방 모습을 재현해 놓았다.
돌하르방
제주도의 특징적인 석상(石像)으로 우석목·무석목·벅수머리·돌하르방 등으로 불리고 있으나, 현재는 돌하르방으로 통칭되고 있다. 부리부리한 큰 눈, 자루병 같은 코, 단정히 다문 입 등은 위엄과 함께 익살스러운 인상까지 자아낸다. 과거에는 성문(城門)밖에 세워두고 수호신(守護神)으로 모셨으며, 주술적(呪術的)·금표적(禁標的) 기능까지도 담당했던 것으로 보아 장승의 역할과 유사한 것으로 보인다.
정주목과정낭
정주목은 제주도에만 있는 것으로, 대문(大門)이 없는 민가(民家)의 사립문 좌우에 돌이나 단단한 나무로 만들어 설치하는데, 긴 나무로 만든 정낭을 걸칠 수 있도록 3∼4개의 구멍을 뚫어 놓는다. 정낭은 정주목의 뚫린 구멍에 걸쳐둠으로써 마소[馬牛]의 출입방지 및 주인의 외출을 표시하는 기능을 갖고 있다. 주인이 잠깐 이웃집에 갈 경우에는 맨 아래 구멍에 정낭을 하나만 걸쳐두고, 한나절 집을 비울 경우에는 2개, 며칠동안 집을 비울 때에는 맨 위까지 모두 걸쳐둔다. 제주도 민간에서는 올래직이(사립문지기: 門戶守護神)라고도 한다.
우물
우물은 땅을 파서 지하수를 고이게 만든 급수시설이다. 대개 한 마을에 한 두개의 우물이 있어 공동으로 사용했으나, 부유한 집에서는 개인 우물을 소유하기도 하였다. 공동우물은 부녀자들에게 있어서 만남의 장소일 뿐만 아니라 치성을 드리는 공간이 되기도 하였다. 우물 주위의 흙이 붕괴되는 것을 막고 사람이나 가축이 빠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우물 입구 주위를 원이나 네모 형태로 난간을 쌓기도 하는데, 이를 우물방틀이라 한다. 이 우물방틀은 경기도(京畿道) 화성군(華城郡)에서 옮겨온 것이다.
전차
전기의 힘으로 궤도 위를 달리는 차량으로, 우리나라에는 미국인 콜브란(Collbran,H.) 등에 의해 1898년 처음 도입되어 서대문에서 청량리까지 운행되기 시작했다. 황실전용 고급차량 1대와 개방식 전차 8대가 처음 수입되어 운행되었으며, 운전은 일본 경도(京都)전차회사의 일본인이 맡았다. 전차는 신기한 대상으로 사람들에게 각광을 받았지만 개통 1주일만에 탑골공원 앞에서 5살짜리 어린이가 전차에 치어죽는 사고가 나자 성난 군중에 의해 전차 두 대가 소각된 일도 있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도 전차이용승객은 급속히 늘어나 일제강점기에는 부산과 평양에도가설되었고 노선도 점차 확대되면서 가장 중요한 시내 교통수단이 되었다. 8?15광복 후에는 자동차의 보급으로 버스가 중요한 교통수단이 되면서 도로 한가운데를 지나는 전차가 오히려 교통수요에 장애가 된다고 하여 1969년에 모두 철거되었다.
장승동산
장승은 마을을 지켜주는 수호신 또는 지역의 경계표, 이정표 역할을 하는 것으로 마을 입구에 위치한다. 대개 나무나 돌로 만들며 남녀를 상징하는 두 기가 마주보거나 나란히 서있다. 장승, 장성, 벅수, 벅시, 장신, 수살목, 돌미륵, 돌하르방 등 지역에 따라 다르게 불린다. 우리 나라 중부이북 지방은 대개 나무장승이 많고, 대부분 사모(紗帽)를 쓰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반면 중부이남 지방은 돌장승이 많고 머리에는 벙거지[戰笠]를 눌러 쓰고, 눈이 툭 튀어나온 퉁방울 형태를 하고 있다. 이 돌장승들은 전국 각 지방의 장승들 중 그 지역의 특성을 잘 나타낸 대표적인 것을 선정하여 실물 크기로 똑같이 만들어 세운 것이다.
장승동산 - 돌탑
돌탑은 막돌을 이용해서 원뿔대 모양으로 차곡차곡 쌓아올린 탑으로 마을공동체신앙의 대상물이다. 돌탑은 주로 마을 입구에 위치하며, 장승 ·솟대와 더불어 마을 밖으로부터 들어오는 재앙을 막아주는 역할을 한다. 돌탑 안에는 때로 내장물을 넣는 경우가 있는데, 마을의 화재를 방지하기 위해 숯이나 솥을 넣기도 하고, 풍년을 기원하기 위해 오곡 단지나 밥주걱 ·쇠스랑을 넣는 경우도 있으며, 제액초복(除厄招福)을 위해서 특정한 부작(符作)을 넣기도 한다.또한 풍수 비보상 세워진 돌탑에는 돌이나 청동 등으로 두꺼비와 같은 동물 형상을 만들어 넣는다. 돌은 기단부와 탑 본체, 탑 윗돌의 삼단으로 구성되며, 돌탑 윗돌의 모양이 길쭉한지 또는 둥글게 되어 있는지로 탑의 남녀 성별을 구별한다. 돌탑은 하나가 세워지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둘을 쌍으로 세우는 경우도 있다. 여기의 돌탑은 충북 옥천군 동이면 마티마을의 돌탑을 재현한 것이다.
장승동산 - 솟대
솟대는 마을 입구에 장승·돌탑 등과 함께 또는 단독으로 세워 놓음으로써 마을로 들어오는 잡귀, 잡신, 액(厄), 살(煞) 등을 막아주는 마을의 수호신간(守護神竿)이다. 나무나 돌로 된 긴 장대 위 부분에 오리 등 새 모양의 조형물을 올려놓은 형태이다. 동제(洞祭)를 마치고 나면 북어, 대추 등의 제물 일부와 실타래, 백지 등을 함께 솟대에 매어 놓는데, 이는 수호신에 대한 예물로서의 의미를 지닌다. 또한 풍년과 풍어를 기원하는 뜻에서 오리 입에 지푸라기나 붕어 및 곡식을 넣은 복주머니 등을 물려 두기도 한다.
효자각
나라에서 허권(許權 1847-1895)에게 내린 효자 정려(孝子旌閭 효자에 내린 표창)를 기념한 효자비(孝子碑)의 보호 건물과 출입문.효자각은 연꽃 봉우리·용·봉황 등을 조각하고 단청으로 화려하게 장식했다. 효자문에는 ‘孝子門 효자문’이라고 쓴 현판이 걸려 있고, 주위에는 호랑이와 매란국죽(梅蘭菊竹)이 그려져 있다. 효자각과 효자문을 통해 효를 중시했던 당시의 사회상과 건축기술, 공예문화를 엿볼 수 있다. 이 건물은 허권 후손의 살림집 안에 있었으나 2005년 홍수로 손상되는 등 보존하기가 어려워 2008년 이곳으로 옮겨서 보존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물에 잠겨 썩은 기둥 일부를 보수하였고 담장은 영역만을 표시해 놓았다.
추억의거리
국립민속박물관(관장신광섭)은 국립어린 이박물관 개관에 맞춰 1960~70년대 당시 엄마 아빠의 그 시절 가슴을 적시는『추억의 거리』를 야외전시장에 실물 그대로 재현해 놓았다. 『추억의 거리』는 박물관 동편 1,900㎡의 면적에 기존에 있던 개항기시대의 전차, 한약방, 포목전을 새롭게 재정비하고, 그 옆에 1960~70년대 여러 상점 건물을 설치하여 당시 일상의 생활문화를 쉽게 이해할 수 있는 흥미로운 공간으로 마련된다. 『추억의 거리』에는 다방, 식당, 만화방, 레코드점, 이발소, 양장점, 사진관 등 다양한 근·현대 거리 모습이 재현된다. 따라서 엄마 아빠의 손을 잡고 국립민속박물관을 찾는 어린이들에게 새로운 추억의 명소로써 거듭날 것이다.
추억의거리 - 이발소
한겨울이면 연탄난로를 놓고 그 철사줄에는 수건이 걸리고, 연통에는 비누거품을 뭉갠 흔적, 그리고 한쪽 벽에는 열댓 마리 새끼 돼지에게 젖을 먹이는 그림이나‘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로 시작하는 푸슈킨 의 시가 걸려 있는 이발소는 그때 그 시절 남자들이 치장을 위해 들르는 유일한 곳으로 장발 등 당시 남자들의 치장도 여자들 못지않게 유행을 탔음을 알 수 있는 공간이다. 추억의 거리 이발소의 간판명은 화개이발소이다. 실재로 화개이발소는 종로구 소격동에 2007년 8월말까지 약 50년 이상 존재했던 곳으로 국립민속박물관은 2007년 이곳의 자료를 수집하였고, 이발소 의자, 이발도구, 이발소 그림 등 이발소 물품들을 전시한다.
추억의거리 - 다방
다방은 커피 판매에만 국한되지 않는 공간이었다. 다방의 간판명은 약속다방이며, 이는 그 당시 가장 많이 썼던 다방 이름 중의 하나였다. 그 때의 다방은 차를 마시고 쉬는 장소로서의 역할을 넘어서 다양한 문화적 중추활동을 하기도 하였는데 특히 음악다방이라는 공간은 많은 젊은이들이 모여들어 문화를 공감하고 유행을 만들어냈던 시대 흐름의 한 축이었고, LP음악을 들었던 세대에게 있어 음악은 과거로 돌아갈 수 있게 하는‘타임머신’과도 같다.
추억의거리 - 양장점
양장점의 간판명은 노라노양장점이다. 한국 최초의 패션쇼를 열었던 노라노 여사는 ‘노라노의’집이란 양장점을 열었고 고급의상실 붐을 일으켰다. 그 후 양장점 의 수는 눈이 띄게 늘어났고 쇼우 윈도우 에 매력 넘치는 마네킹이 등장하였으며 화려한 차림의 여인들이 유행을 만들어내며 거리를 활보하기 시작하였다.
추억의거리 - 만화방
좁다란 가게와 불편한 나무 의자, 연탄난로. 흑백TV 등은 학교 마치고 집에 오자 마자 달려갔던 어린 시절의 추억이 묻어 있던 만화방 풍경이다. 단행본도 재미있 지만 연작은 만화방을 가지 않고는 배겨나 지 못하게 했다. 후속 편이 나왔다는 이 돌기가 무섭게 만화방 문을 밀치고 들어가 진열대에서 꺼내 볼 때 그 호기심이 충족된 짜릿함은 지금도 묽어지지 않았다. 만화책장을 넘기면서 한 입씩 먹던 라면 땅과 쥐포 맛 또한 잊을 수 없다.
연자방아
연자방아는 평평한 원형의 돌 위에 다시 둥근 돌을 얹어 이것을 소나 말로 돌려 곡식을 찧는 도정(搗精)기구로 '연자매', '돌방아', '돌방애'라고도 한다. 맷돌에서 발전한 것으로 보이는 연자방아는 윗돌과 아랫돌이 마주 돌아가는 맷돌과는 달리 축력(畜力)에 의해 윗돌과 아랫돌이 수직을 이루며 돌아감으로써 일의 능률이 맷돌에 비해 훨씬 크다. 곡식을 빻을 때는 한 사람이 소나 말의 고삐를 잡고 앞에서 몰고, 다른 사람이 그를 따르며 넉가래로 곡식을 뒤집어 준다. 연자방아를 만들려면 비용이 많이 들기 때문에 마을 사람들이 공동으로 장만해 함께 사용했는데, 기계식 방앗간이 들어오면서 거의 사용하지 않게 되었다.
문·무인석
문인석과 무인석은 12지신상(十二支神像)과 함께 망자(亡者)를 지키기 위해 무덤 앞에 세우는 석상(石像)으로, 각각 문관(文官, 복건을 쓰고 홀(笏)을 가지고 있음)과 무관(武官, 갑옷을 입고 칼을 차고 있음)을 상징한다. 우리나라의 문·무인석은 중국의 영향으로 8세기부터 왕릉(王陵)에 나타난다. 시대에 따라 배치와 조각 양식이 다양하게 변하는데, 이러한 문·무인석 조각 양식의 변화는 우리나라 조각사(彫刻史)의 중요한 자료가 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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